매일 Q.T

 오늘의 Q.T
제목 : 자유케 하는 법

본문 : 갈라디아서 5장 ~ 6장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은 복음의 메시지는 한마디로 자유다. 주님 안에서 율법의 요구가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율법은 구속이다. 반드시 무엇을 하든지, 또는 하지 말아야 하며 필수적으로 지켜야 할 부분이 너무 많고 사람은 거기 매여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지경에 빠지기 때문이다. 

또 누구든지 하나님의 완전한 법인 율법을 다 지킬 수 없음에도 몇몇 법에 능통하고 잘 지킨다하여 그렇지 못한 사람을 비방하고 정죄하는 바리새인적인 위선가들에 의하여 백성의 다수는 졸지에 범법자가 된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를 살려야 할 법이 어떻게 저주의 법이 되었는가 하며 안타까워 했다. 더 큰 아픔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율법에 매여 사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것도 이미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 아래 들어와 있으면서도 율법의 요구, 행위 구원에 얽매여 자신의 믿음을 확정치 못하고 있는 사람들 때문에 더 안타까워 하였다. 

이에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5:1)고 선포하였다. 그런데도 여전히 율법에 매인다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5:4)가 된다고 하였다. 

그런고로 "성령을 따라 행하라"(5:16)고 한다. 성령은 살리는 법이고 구원의 법이다. 반면 육체의 법은 행위법이요 그 안에는 참 생명이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분쟁, 시기, 분냄, 당 짓는 것, 분열, 이단, 투기.. 같은 것들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오직 성령의 법만이 사랑과 희락과 화평,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같은 열매로 이어진다고 하였다. 

나는 오늘 어느 편에 서 있는가? 내 마음을 주장하는 것은 성령의 법인지 육체의 법인지 살피고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5:26)란 말씀처럼 성령 안에서 살면서 죄 사함과 구원의 은혜를 누리며 소망과 자유, 기쁨을 누리며 살아야 할 것이다












제목 : 성령으로 행하라.

본문 : 갈라디아서 5:16~26


본문에는 두 가지가 극명하게 대비되고 있다. 그것은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인데 이 둘은 서로 대적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육체의 소욕만 따라가면 성령을 따라 가는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인데 육체의 소욕은 멸망이요 성령의 삶은 영생이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의 몸부림은 1)육체적 소욕 :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21절). 문제는 이런 삶을 사는 이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는 것이고 

2)성령을 따라 사는 삶에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22~23절)라고 하였다. 이것은 반드시 따라야 할 삶으로 '하나님 나라의 보장'에 해당되는 말이다. 그런고로 그리스도인은 육체적 소욕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고 하였다(24절).

문제는 육체를 따라 사는 사람도 자기 의지이고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도 자신의 선택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하나님 나라의 영생이냐 아니냐 하는 것의 어마한 결과로 나타나는 줄 반드시 알아야 한다. 오늘 나는 무엇을 따라 사는가? 여전히 십자가에 못박지 못한 악한 부분들, 세상적 유한한 것들에 매이는 어리석음을 버리고 성령을 따르는 삶에 보다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할 것임을 깨닫는다.












제목 : 은혜의 복음

본문 : 갈라디아서 5:1~15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강력한 복음의 핵심을 변증한 바울은 본문에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1절)고 하였다. '종의 멍에'라는 종교적인 것이요 율법의 행위를 뜻한다. 

예컨데 3절 말씀처럼 여전히 율법주의에 얽매여 '할례'를 필수적인 요소로 행하여야 한다면 할례 뿐 아니라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가 된다. 어떤 것은 실천하지만 다른 더 많은 법들은 놓치면 안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것이 왜 그리 문제가 되는가 하니 만약 무엇을 행함으로 구원 받을 수 있다고 가정하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힐 필요가 없게 된다. 자기 행위로 누구나 구원받기 때문이다. 

이에 바울은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4절)라고 하면서 율법이 아닌 '은혜'의 복음임을 재차 강조한다. 

그래서 "너희를 요동하게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10절),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은 스스로 베어 버리라"(12절)고 할 정도로 강력한 메시지를 던졌다. 

과연 오늘 나의 구원은 율법이 아닌, 행위가 아닌 '은혜 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뤄지는 것임을 다시한번 상기하자. 그 구원에 절대 감사하는 자가 되며 은혜 가운데 감사하는 신앙으로 이어지게 하자. 














제목 : 자유하라

본문 : 갈라디아서 4:21~31


사도 바울의 논리는 참 명쾌하다. 율법과 복음의 차이를 계속 설명하면서 기독교 신앙 안으로 들어왔지만 여전히 율법주의의 전통에 얽매여 참 자유자가 되지 못하는 성도들을 향한 안타까운 부르짖음의 표현이다. 그것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예로 들면서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잉태치 못하자 하갈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그로 말미암아 태어난 자식이 이스마엘이다. 그러나 이스마엘은 조급함의 결과이다. 

나중 하나님의 언약대로 때가 되니 사라에게서 아들이 얻어지고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한다. 비록 이스마엘이 먼저 태어났지만 이삭은 하나님의 언약 가운데 탄생한 약속의 자녀이며 장차 오시게 될 메시야가 곧 하나님의 공식적 계승자임을 나타낸 것이다.

무엇보다 이스마엘은 이삭에 대하여 박해를 한다. 만약 이삭이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아브라함의 모든 재산과 권리는 다 자기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를 바울은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29절)하는 것과 똑같다고 설명한다. 

곧 육체를 따라난 자는 이스마엘인데 율법을 상징하였고 성령을 따라난 자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복음을 뜻한다. 예수님 당시에도 율법주의는 계속 복음주의를 대적하고 핍박하고 마침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다. 마치 이스마엘이 이삭을 박해한 것과 같다. 이에 하나님의 개입이 일어났으니 그것은 곳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30절)는 것이다. 

왜?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복음은 곧 자유의 법이요 우리는 더 이상 여종의 자녀가 아닌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이다(31절). 

다시 묵상하건데 복음은 참 자유를 누리게 하는 법이고 율법은 그 자유를 구속하는 법이다. 당시 유대 기독교인들이 그래서 다시 율법주의로 돌아가거나 관행처럼 율법의 온갖 의식들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참 자유와 은혜를 빼앗아가기 때문에 대하여 바울은 그토록 안타까워 했던 것이다. 

당연한 말이다. 누가 잘못가고 있는데, 잘못해서 멸망으로 떨어지는 것을 안다면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느냐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아직도 율법주의와 행위 구원에 꾀여서 스스로 자신을 옥죄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 모두가 복음전도의 대상자들이요 또 그들을 건지고 구원해내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음을 깨닫고 복음의 사명자로서의 삶을 다시 한번 다짐하자.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은 자유.. 얼마나 소중하고 감사한 일인가?













제목 : 몽학선생

본문 : 갈라디아서 3:23~29


사도 바울의 강력한 주장은 우리의 구원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어지는 것인데 그동안은 율법을 통하여 이런 법칙을 가르쳐주신 것이고 그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안내하는 초등교사의 역할을 한 것이라 하였다(24절). 

'초등교사'라 함은 옛 시대 주인의 자녀를 훈련시킬 책임이 있는 집사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래서 그가 성년이 되기까지 따라다니며 가르치고 훈계하는 역할을 하였으며 악한데 물들지 않도록 격리시키고 보호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전의 성경은 이를 '몽학선생'이라 불렀는데 성인이 될 때까지 교양, 교육, 인간관계, 무예 등을 위한 후견인으로서 책임을 맡았던 전문 노예를 말한다. 이처럼 법은 마치 몽학선생, 곧 초등교사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백성으로 어떻게 살 것이냐 하는 것과 우상으로 얼룩진 이방인들로부터 격리하며 보호하는데 필요한 완충장치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 대속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되었는데 이것이 이뤄지기까지 율법의 역할을 설명하한 것이다.

그래서 25절에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고 선포한 것이다. 그리고 이 믿음으로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27절)고 한다. 믿음으로 내가 그리스도 예수님처럼 된 것이며 나는 그리스도의 것, 곧 예수의 사람이 되었다(29절). 그런 사람은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가 되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복이 내 것이 되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구원의 약속이 성취되는 것이다. 

이 강력한 복음의 메시지에 바울은 평생 감동하여 뭇 백성들을 가르쳤고 전파했으며 자신의 몸을 조금이라고 귀하게 여기지 않는 초절정의 예수의 사람이 된 것이다. 오늘 나는 얼마나 이 복음에 감사하고 있는가? 이 언약의 성취에 얼마나 흥분됨과 아울러 이 감격을 전하기 위한 준비가 되어 있는지 자신을 고찰해보자. 과연 오늘 말씀 그대로 이제 나는 그리스도의 사람이 된 것이다. 

이 감격 속에 더욱 주님을 배워나가는 믿음으로 길러 나가자. 이제 우리의 몽학선생은 성령이 되셔서 우리를 가르치시고 생각나게 하시며 인도하여 주시는 역할을 해주시고 있음을 알고 더욱 주님과 그 복음을 배워나가는 계기로 삼자. 














제목 : 의롭게 되는 길

본문 : 갈라디아서 2:1~21


신앙인으로서 거룩함에 대하여 꿈꿔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거룩함에는 그 무언가 하는 신비감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사실 거룩이라는 말은 하나님 외에는 쓸 자격이 안되는 말이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다 죄인이기에 아무리 도를 닦고 수양을 했다할지라도 거룩이란 말은 쓸 수가 없다. 그도 죄인인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우리는 거룩을 소망하지 않는가? 그 거룩에 이르기 위한 첫번째 단계가 의로움이다. 누구든 착한 선을 실천할 수는 있지만 '의로움'이란 결코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 

성경이 말하는 의는 사실상 의롭지 못한데 '의롭다고 인정하여 주는 의'이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이 의로움에 이르기 위한 몸부림으로 율법을 다 지켜나가는데 있는 것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뤄진다고 말씀하는 것이다. 내 공로나 선이 아닌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말미암아 그 의가 나에게 덧붙여지는 상태를 의미한다는 말이다. 

바울은 이러한 의는 결코 '율법의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뤄진다고 강조하였다. 과연 그러하다. 의로운 자가 하늘나라에 입성하는 것이 맞다. 반면 의롭지 못한 자가 천국에 들어갈 수는 없지 않는가? 그 의로움을 얻기 위해서는 나도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야 한다. 주님과 하나가 되는 상태이다. 

십자가는 죽음을 뜻하는데 내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이전의 세상에 대하여 죽어 있는 상태라는 말이다. 그래서 현재 나의 호흡은 내 스스로 산 자로서의 호흡이 아닌 주님이 그저 은혜로 주시는 호흡이다. 그런고로 나는 더 이상 내가 나를 주장하는 삶이 아닌 나를 사랑하사 자신을 버리신 예수님 안에서의 삶이 되어야 한다(20절). 

주님 안에서 나는 죽었다고 고백하는 삶, 이것이 진정한 믿음인데 실상은 그러지 못한 것에 대하여 아픔과 실망을 느낀다. 왜? 나는 여전히 내 안에 내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전히 남아 있는 혈기, 육신의 정욕, 이생의 자랑과 명예에 연연하고 있는 것이다. 

참 예수의 사람답게 살지 못하면서 예수 밖에 있는 사람을 예수 안으로 데려오기는 힘든 것 아니겠는가(14절)? 그런고로 의로움이란 나의 어떤 선이나 공로가 아닌 나를 위하여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박히사 이런 나의 죄를 씻기 위하여 흘리신 주님의 피, 곧 보혈을 의지함으로 주어지는 은혜의 '義'인 줄 확신하자. 

그리고 여전히 아직 죽지 못한 내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며 내가 아닌 주님이 나의 삶에 나타나도록 힘쓰자.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20절). 이 말씀의 참된 실천을 위하여 엎드리고 더욱 낮추는 자신으로 살아가길 다짐하자. 














제목 : 하나님께 영광

본문 : 갈라디아서 1:11~24


바울은 자신이 주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복음을 전파하는 자가 된 것은 자신의 뜻도 아니고 사람에게서 배운 것도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임을 밝히면서 자신의 사도적 정통성을 강조하고 있다(11~12절). 

특히 바울은 일찌기 주님을 따르는 자들을 핍박하고 멸시하였고 자기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사람들의 전통적인 유대교 신앙을 지나치게 믿어 광신도라 일컬을 정도였는데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은 이미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15절)의 놀라운 은혜가 임하여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사도로 부르심을 받게 된 것임을 계속하여 밝히고 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의 간증이며 신앙고백이다. 한마디로 예수 핍박자였던 자신이 예수 증거자가 된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이다. 그런데 진작 바울, 곧 이전의 사울은 지독한 기독교 신앙의 박해자였기에 저 멀리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21절)까지 그 악명이 자자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들조차 '얼굴로는 알지 못하고'(22절) 했는데 결코 예수님의 사도로서 인정받지 못했다는 말이다. 그런 바울이 변했다. 완전히 달라졌다. 어떻게 달라졌는가? 23절에 보니 전에는 '박해하던 자가 이제는 그 믿음을 전파하는 사람'이 되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상황으로 반전된 것이다. 

예수를 믿으면 이렇게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거듭남'이기 때문이다. 내가 변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내가 멈추면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워진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내 행동, 말 하나 하나가 너무 중요하고 책임이 있음을 고백한다. 오늘 나는 나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믿음인지 '하나님의 근심'이 되어 있는지 자신을 깊이 고찰해야 할 것이다.















제목 : 다른 복음은 없다.

본문 : 갈라디아서 1:1~10


갈라디아서는 기독교 교리의 핵심 부분을 다루고 있는데 그 주제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기독교 신앙의 대헌장이라 할 수 있다. 무엇보다 당시 만연한 율법주의가 기독교 복음주의와 부딪치면서 많은 혼란을 일으켰는바 바울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역량을 발휘하여 순수 신앙을 옹호하고 있다. 

그것의 뚜렷한 정체성을 위하여 1절부터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암은 것도 아닌.."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신의 사도직이 이뤄졌음을 고백한다. 사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정체성은 누구에게나 확신을 줄 수 있는 분명한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까지 함으로 바울이 말하려 했던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한 마디로 '다른 복음'은 없다는 것이다. 

7~9절까지 세 번이나 반복되게 언급할 정도로 다른 복음에 빠지는 자는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음을 토로한다. 왜? 그리스도 예수님 한 분으로 복음은 완성되었는데 다른 불순물들이 섞임으로 순수 복음이 변질되어 구원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다. 믿음의 결국은 구원인데 이 구원을 흔들어대는 세력들이 당시 갈라디아 교회에 침투하였기에 긴급하고 확실한 증언을 하여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율법주의는 자주 예수님과 부딪쳤다. 안식일 계명만 해도 율법주의는 반드시 일하지 말고 안식해야 한다는 명제로 나왔지만 예수님의 복음은 안식일 자체가 사람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인만큼 그 법규 자체에만 매여서 사람을 살릴 수 있는 것 조차 외면하는 형식주의는 결코 동의할 수 없는 것이다. 

그야말로 예수님의 복음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주님은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다"(4절) 하였다. 이것이 복음의 가장 큰 핵심이다. 복음은 말 그대로 복된 소식, 기쁜 소식이다. 무엇이 기쁜가? 사람을 살리는 것이다. 건져내는 것이다. 그런데 율법주의에 얽매여 살릴 수 있는 사람을 살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미 신앙이 아니란 말이다. 

이 논리를 두고 바울은 결코 사람들의 눈치나 인기주의에 영합하여 살지 않을 것을 맹세한다. 그것이 10절 말씀이다.
"하나님께 좋게 할 것인가 사람의 기쁨을 구할 것인가?" 하는 명제인데 당연히 이 복음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따름이 원칙 아니겠는가? 바울은 그 결론에서 자신은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 되었음을 선포하고 고백한다. 그래서 1절에서는 그런 자신의 정체성을, 10절에서는 그 정체성을 따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 것을 고백한 것이다. 그것은 곧 복음의 실천이다.

오늘 나는 얼마나 율법주의에서 벗어났는가?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으로 말미암은 자유와 기쁨을 얼마나 누리며 사는지, 이것이 또한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묵상해보자.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분명한 자유를 얻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다시한번 되새기자.
















제목 : 너희는 증인이 되라

본문 : 누가복음 24:36 ~ 53


낙심한 제자들,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 모두가 예수님의 말씀에 평소 귀를 기울이지 못한 때문이다. 말씀을 '기억' 못하니 '슬픈 빛'의 얼굴들이 되고 말았지 않은가? 그런 제자들의 한심한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그들 가운데 나타보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36절)고 축복하신다. 

혼나야 마땅한데도 주님은 꾸지람보다 위로를 더하여 주셨다. 여전히 제자들은 '놀라고 무서워'(37절)하면서 부활의 예수님을 '영'으로, 유령처럼 생각하고 있다. 이에 주님은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38~39절)고 하시면서 그들의 눈과 마음에 확신을 심어주셨다. 

그리고 마지막 승천하시는 길에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48절)하시면서 제자들이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듣고 보고 배운 것을 증거하는 증인이 될 것을 부탁하셨다. 어찌보면 이렇게 못났고 어리석으며 미련한 제자들에게 무얼 더 기대할게 있다고 주님은 그렇게 하셨을까 싶다. 

그럼에도 복음은 이 작고 어리석은 제자들을 통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기 시작했으며 변방에 위치한 우리도 이 복음을 접하고 믿게 되었으니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 1:21)고 찬양한 것이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지혜롭고 똑똑하고 문벌 좋은 사람만 택한 것이 아니라 이 제자들처럼 너무 무기력하게 보이고 무얼 하나 제대로 하겠나 싶은 사람들을 부르셔서 온 세상을 변화시켜 놓는 엄청난 영향력의 사람들로 만드신 것이다. 과연 우리도 그러하지 않겠는가? 

초라하게 보여도 오직 주님만 바라보고 사모하는 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은 오늘도 하나님의 거룩한 일들을 이뤄가시는 줄 믿는다. 나도 그 안에 포함된 한 사람이라면 너무 족하고 귀한 축복이다. 이 믿음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제자의 길을 걷는 새로운 다짐을 해보자. 



  ♬ "똑바로 보고 싶어요 주님 온전한 눈짓으로 ... 주님 이 낮은 자를 통하여 어디에 쓰시려고 .. 당신께 드릴 것은 사모하는 이 마음 뿐 이 생명도 달라시면 십자가에 놓겠으니  허울뿐인 육신 속에 참빛을 심게 하시고 가식뿐인 세상 속에 밀알로 썩게 하소서" 











제목 : 빌라도의 변명

본문 : 누가복음 23:13 ~ 25


다시 빌라도 앞으로 돌려보내진 예수님을 빌라도는 어찌하든지 할 수만 있으면 풀어주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래서 명절 중에 특별사면이 있는데 강도 바라바와 예수 가운데 누구를 석방하면 좋을 것인가하고 물었다. 빌라도의 예상은 당연히, 아무리 살펴봐도 전혀 죄가 없으신 예수님을 풀어주라고 할 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군중들은 오히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를 질러 대었다(21절).

기가 막힌 빌라도는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를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다"(22절)고 항변하는데도 무리들은 총독에게 덤벼들면서 '큰 소리로 재촉'(23절)하면서 반대를 하였다. 결국 빌라도는 군중들의 소리를 감당치 못하고 예수를 '그들의 뜻대로' 하도록 넘겨주었다. 이것이 빌라도의 가장 큰 잘못이다. 

지도자가 백성들의 우둔함을 깨우치고 가르치며 그래도 안 들으면 법으로 강력하게 집행을 하여야 하겠거늘 빌라도는 행여라도 이런 사건으로 자신의 위치가 흔들릴까봐 스스로도 심문하였으나 아무 죄 조차 찾지 못했던 예수님을 데모하면서 흥분해 있는 무리들에게 넘겨주었음은 엄청 큰 범죄에 해당되는 것이다. 

물론 예수님은 처음부터 이 길을 걷기 위하여, 이 잔을 마시기 위하여 세상에 오셨지만 너무 짧고 허무한 가운데 십자가에 저절로 넘겨지는 고난을 받게 된 셈이다. 빌라도는 분명 총독으로서 자신의 권력과 판단이 있고 법을 집행하기 위하여 군대로 있으며 힘을 부여받은 것인데 그것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사도신경에 보면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라고 하지 않는가? 그렇게 저주의 이름이 되어 2천년이 지난 오늘까지 그 이름이 악함으로 거론되고 있으니 총독으로서 권세를 바로 활용치 못한 죄가 이렇게까지 큰 것이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달란트를 바로 활용하지 못하면 나도 제2의 빌라도가 될 수 있음에 주목하자










제목 : 빌라도와 헤롯

본문 : 누가복음 23:1 ~ 12


빌라도 총독 앞에 선 예수님은 백성의 무리들이 아무리 고발하고 거짓 증거를 하여도 결국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4절)고 선포한다. 그랬더니 무리들이 소동을 일으키는데 '죄 없으신 예수님'이심을 스스로 알고도 자신의 신분에 지장을 받을까봐 빌라도는 예수님의 출신지인 갈릴리를 관할하는 헤롯에게로 보낸다. 

한편 헤롯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많이 들었는지라 궁금도 하고 많은 호기심으로 예수님의 이적을 자기 눈으로 보기를 원했는데 예수님은 아무런 대응도 하시지 않으셨다. 이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힘써' 예수님을 고발하니 결국 헤롯도 예수님을 업신여기고 희롱하다가 빌라도에게 도로 돌려 보내었다. 

이런 일을 계기로 이 둘은 "전에는 원수였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12절)고 하였다. '전에는 원수' 였는데 이제는 친구가 되었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현실에서도 그런 일이 많다. 대부분은 정치적 이유가 제일 많고 일반도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는 칼을 내려 놓고 서로의 손을 잡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경우는 심히 안타까운 일이다. 

왜? 빌라도와 헤롯은 예수님을 처형시키기 위한 '악한 일'을 위하여 일시적인 친구가 되었을 뿐이다. 서로의 협조가 필요했다는 말이다. 오히려 무죄를 판결하고 예수님을 살리기 위하여 그들의 마음이 하나가 되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있다. 

오늘 나는 무엇을 위하여 교제하며 손을 내미는가? 또 그 손을 잡는 사람은 누구인가를 깊이 생각하자. 가장 중요한 것은 죽이기 위한 손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기 위하여 내미는 손이 되어야  할 것이다.













제목 : 베드로의 통곡

본문 : 누가복음 22:54 ~ 62


정말 큰 소리치며 장담했던 베드로는 예수님이 눈 앞에서 체포되시자 그만 무너져버렸다. 온갖 이적을 일으키시던 주님이 군병들 앞에서는 어떤 이적이나 항거조차 하시지 않고 마치 어린 양처럼 그대로 잡히는 무기력함을 보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기도하라고 하시던 주님의 말씀을 가볍게 생각한 탓이다. 기도해야 하나님의 뜻을 알고 기도해야 주님이 왜 이 땅에 오셨는지 알고 기도해야 왜 십자가를 질 수밖에 없었나 하는 것을 깨닫는데 기도가 없으니 자기 생각과 감정으로만 모든 것을 판단하기 때문이다.

'감옥이든 죽는 곳이든' 같이 따라 가며 주님과 함께 있겠다고 큰 소리치 쳤던 베드로.. 어쩌면 자신에게도 임할지 모르는 죽음의 위협 앞에 그는 마음이 먼저 무너졌고 마음이 무너지니 행동도 '멀찍이'(54절) 주님과 거리를 둘 수밖에 없어진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세 번의 부인, 배반... 그토록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오직 주님, 오직 예수님.. 오직 그리스도로 믿고 따르던 믿음이 무너져 내리는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면서 그는 심한 통곡을 한다. 자신의 무능함과 스스로 무너져버린 큰 소리치며 장담하던 자아의 무너짐은 차마 죽음의 쓴 잔 보다 더 진한 아픔이었으리라.

정말... 기도해야 할 때 기도하지 않으면, 기도를 필요로 하는 때에 기도가 결여된다면 그 결과는 베드로처럼 무너져 내려 통곡하는 것 뿐이리라. 호미로 막을 수 있는 것도 가래로 막아야 한다. 그마저도 기도가 없으면 갈수록 태산이다.

내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내 신앙을 점검하면서 진심어린 기도가 얼마나 있었는지를 묵상해보자. 주님의 기도는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44절) 기도하시지 않았던가? 왜 기도에 애쓰고 힘쓰고 더, 간절하게 해야 하는 지 베드로의 사례에서 찾으면서 깊은 반성과 함께 새로운 결단으로 이어지게 하자












제목 : 처절히 기도하라

본문 : 누가복음 22:39 ~ 53


제자들과 함께 의미있는 유월절을 보내신 예수님은 다시 '습관을 좇아' 감람산으로 기도하러 가셨다. 이에 제자들이 함께 따라 갔는데 주님은 그들을 향하여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40절)고 하신다. 

기도는 우리의 소원과 소망을 따라 간구하는 내용도 있지만 더 큰 것은 나의 영적 상태의 점검이다. 기도를 통하여 자신을 돌아보고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헤아림으로 하나님의 일에 순응하는 것이다. 

주님께서도 친히 '습관을 좇아 기도' 했을 정도로 기도의 모본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음은 예수님도 기도하시는데 하물며 우리가 기도하지 않아서 되겠는가 하는 뜻이 있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런 기도의 습관을 놓쳐버렸고 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함으로 '유혹, 시험'에 빠지게 되었고 마침내 도망치거나 혈기를 부리거나 배반하는 자리로 넘어진 것이다. 

반면 기도의 필요성과 절대성을 아시는 주님은  기도하는 자세가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44절) 하셨다는 점이다. 그런 기도는 마치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될 정도로 간절하고 뜨거우며 생사를 가르는 처절한 기도였음을 깨닫게 해 준다. 

오늘 대충, 건성으로 하는 나의 기도가 얼마나 한심하고 잘못되었음을 반성케 하는 대목이다. 그래서 주님은 그렇게 피가 떨어지는 듯한 기도를 드리는데 제자들은 잠만 자고 있었다(45절). 십자가를 앞두신 주님, 그 처절한 기도를 스승이 하고 있는데 제자된 이들이 어찌 참여는커녕 잠을 잘 수 있을까? 그게 오늘 우리 모두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간절하지 않으면 아무 응답도 없다. 처절히 원하지 않으면 감사도 사라지고 참 신앙이 아닌 종교인으로 전락할 뿐이다. 제자들을 위한, 바로 나를 위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한 주님의 그 뜨거운 기도를 외면한 체 잠만 청하는 나의 불경스러움을 돌아보고 철저히 회개하여야겠다.

오늘도 그런 기도를 간절히 필요로 하는 환우들이 얼마나 많은가? 여러 형편 앞에 눈물과 한숨의 시간을 보내는 성도는 또 얼마나 많은가? 간절하자, 처절하자. 생사를 넘나드는 기도가 지금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때임을 자각한다.













제목 : 장담하지 말라

본문 : 누가복음 22:24 ~ 34


예수님은 지금 곧 체포될 상황에 놓였는데 한 제자는 스승인 예수를 배반하고, 다른 제자들은 더 기막히게도 자기들끼리 '서로 누가 크냐' 하는 문제도 다투고 있었으니 예수님은 얼마나 기가 막힐까? 이에 주님은 너희는 서로 큰 자가 되어 권세를 누리려 하지만 '나는 섬기는 자' 가 되어 너희 중에 있겠다고 하셨다(27절). 한마디로 철도 없고 상황파악도 못하는 어리석고 미련한 제자들이다. 

그럼에도 주님은 이들을 위하여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30절)고 복을 베푸신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영적 축복이고 하늘에서 누리는 권세이다. 이 땅에서는 제자들 역시 주님처럼 온갖 핍박과 환난을 겪는 가운데 대부분이 순교하게 된다. 

그래서인가? 주님은 대표적 제자였던 시몬 베드로를 향하여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기에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다"(32절)고 하였다. 하지만 늘 자신만만한 베드로는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33절)고 큰 소리치며 장담하였는데 주님은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34절)고 하시면서 주의를 당부하신다. 결국 베드로는 이 말씀 그대로 실수하게 되고 통곡의 눈물을 흘리지 않는가?

우리 중 누가 큰 소리칠 수 있으며 누가 감히 나는 넘어지지 않는다고 자만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진정으로 깨어 있는 사람, 믿음의 사람으로서 주님 가신 길을 따라가며 내 믿음 넘어지지 않도록 항상 겸손한 마음으로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














제목 : 징벌의 날

본문 : 누가복음 21:20 ~ 38

예수님은 종말에 대하여 아주 상세한 표현을 하셨는데 그 날이 바로 '징벌의 날'이라 하셨다. 징벌은 잘못이 있었기에 당하는 결과이다. 어떤 잘못일까? 외형적 유태인들의 교만에 대한 것이다. 

특히 바리새인들에 의하여 가장 크게 묘사된 바 있는데 한마디로 말씀에 대한 경외심이 전혀 없다. 주님을 무시해도 철저히 무시하고 십자가에 그저 내어주면서까지 자기들 기득권 지키는데만 혈안이 되어 있었다.

예컨데 주님은 20절에서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고 하시면서 즉시 피할 것을 말씀하셨는데 겨우 명맥만 이을 정도의 사람만이 빠져 나가고 나머지 사람들은 하나님의 성 예루살렘이 절대 무너지지 않는다고 자만했다. 심지어 먼 곳, 다른 곳에 살던 사람들이 일부러 예루살렘으로 집결하여 단합을 과시했지만 그들은 식민지 받는 종들에 불과했다. 무기도 군대로 조직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 그들이 로마의 군단과 싸워 이길 방법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결국 100만명 이상의 유대인들이 로마의 티투스 장군에 의하여 멸절하고 이스라엘은 온 세계로 다 뿔뿔히 흩어져 버렸다. 경고를 들었을 때 실천에 옮기기 보다는 '설마' 하면서 맹신에만 사로잡혀 있었음이 가장 큰 원인이다.

21~26절 말씀은 바로 그런 재앙의 때, 마지막 환난의 때가 어떠한지를 보여주신다. 나하고는 관계없다고 한다면 나도 자만에 빠진 이스라엘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특히 24절에 보면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고 하셨는데 최초의 선민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자 구원의 화살은 이방인에게로 넘어 간 것이다. 

그 이방인들 중에는 우리도 포함되어 있다. 이제는 한국인이 유대인들을 위한 선교사가 되어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고 있지 않는가? 

'이방인의 때'란 결국 이방인들에게로 들어간 복음으로 구원받게 된 사람들이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는 때를 가리킨다. 지금이 바로 그런 시대 아닌가? 하지만 아직 세계는 그리스도 예수님과 무관한 이방인들이 너무 많다. 

세상의 종말과 인생의 한계와 구원을 반드시 전하고 가르쳐야 할 필요가 우리에게 있다. 우리 역시 말씀 밖에 있거나 말씀의 실천이 없다면 진작 패망한 이스라엘처럼 환난의 날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처참한 신세가 되고 말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에 대한 경계가 부족하고 듣지 않는 사람들을 위하여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33절)고 하셨다. 절대 이 말씀은 변치 않는다는 언약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철저한 무관심 속에 사는 것을 말한다. 바로 이런 사람들에게 심판은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34절) 찾아 온다고 하였다.

말씀에 대한 경고를 받고 말씀을 가까이 하며 경외하는 마음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할 것이다. 종말은 주님의 엄격한 메시지이다. 틀림없이 일어난다는 말이다. 

다른 모든 일들도 그 말씀 안에서 이뤄졌는데 이 심판의 말씀만 거짓일 수 있겠는가? 반드시 이뤄지고 말 종말을 대비하면서 정말 깨어 있는 신앙, 말씀을 철저히 따르는 신앙을 유지하는 가운데 이 심판에서조차 구원을 이루는 믿음의 사람이 되길 간구하자.















제목 : 종말의 징조

본문 : 누가복음 21:1 ~ 19


종말의 징조와 그 상황에 대하여 말씀하시던 주님은 먼저 한 가난한 과부의 헌금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그것은 이 과부의 헌금이 부자들이 헌금한 것보다 더많다고 하신 것이다. 그 이유는 부자들은 많은 것 
가운데 일부를 넣었지만 이 과부는 자신의 전부를 드린 것과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라 하셨다(1~4절). 

한마디로 물질 문제이다. 과연 종말이 될수록 사람들은 자신의 자산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주님보다 더 
재물을 의지하며 물질을 하나님보다 높은 자리에 두는 일들이 일어날 것임을 예시한 것이다.

이어서 예루살렘의 멸망과 장차 있을 일들에 대하여 예견하셨는데(6~19절) 한 마디로 마지막 때가 되면 
온갖 환난이 일어나는데 심지어 가장 가까운 부모와 형제 친구들까지 나를 적에게 넘겨주는 경우도 생기며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게 되는데 순교자들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들은 한결같이 예수 믿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예수의 이름 때문에 온갖 불리한 증언과 핍박을 받는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이런 때에도 하늘의 능력을 주셔서 벗어나게 하시겠다 약속하신다. 
어떻게 변명할 것을 궁리하지 않아도 뛰어난 말씀과 지혜를 주시겠다고 하신다. 성령께서 반드시 도와주신다는 말이다. 
문제는 그래서 잘 감당하고 벗어나는 신자들도 있을 것이지만 죽는 신자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억울하지 않을까? 오늘의 말씀은 그럴 필요가 없다 하신다. 왜? 사람은 누구나 언제든 갑자기 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살 수도 있겠지만 결국은 육신이란 다 죽는 법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영혼의 구원으로 연결된다. 
19절에 그 해답이 있다.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고 하신 것이다. 

믿음을 지키기가 쉽지 않은 때가 다가 오지만 이같은 인내와 말씀을 바탕으로 잘 감당하고 이기는 믿음이 되도록 항상 
기도로 준비하는 자세를 갖춰야 할 것이다.














제목 : 나의 주 그리스도

본문 : 누가복음 20:41 ~ 47

예수님을 환호할 때 사람들은 곧잘 '다윗의 자손 예수'라는 표현을 자주 썼는데 이는 성경을 가장 잘 안다는 서기관들의 가르침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육신적으로는 다윗의 자손이 맞는 말이나 모두 맞는 지식은 아니다. 

그것은 시편의 저자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기 때문이다(44절, 시110:1). 다윗의 이 표현은 또한 "내가 네 원수를 네 발등상으로 삼을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43절)는 말씀에 의지하는데 발등상으로 삼는다는 것은 그 발 밑에 둔다는 말이다. 정복자와 정복을 당한 관계에서 이뤄지는 표현이다. 

시편 110편은 다윗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장차 오실 메시아를 예언한 내용이으로 다윗은 그 메시아를 가리켜 “내 주”(42절)라고 표현한 것이다. 비록 육신으로 보면 자신의 혈통에서 태어날 자신의 자손이지만, 영적으로 그분은 자신의 주님이시며 최후의 심판때 하나님 우편에 앉아 온 세상을 다스릴 영광의 주님이심을 고백한 말이다(3절). 

특히 다윗은 이스라엘 최고의 왕국을 이룬 사람이고 많은 전쟁을 통하여 영토를 아주 넓게 확장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런 다윗이지만 그의 진정한 '주'는 장차 오실 그리스도 예수라는 사실을 예견하고 고백하였음을 알아야 하겠다.

우리 신앙에서도 자주 예수님을 '나의 왕, 나의 주님'으로 표현한다. 내가 아무리 높아도 다윗을 따를 수 없다. 그런데 그 다윗조차 그리스도를 향하여 '주님'이라고 고백했는데 나는 내 신앙에 있어서 그리스도를 과연 '나의 '주님, 나의 왕, 나의 주인'으로 고백하는지 묵상해보자. 예수님이 내 인생의 실제적 지배자이시고 왕이 되실 때 나는 그 왕의 통치를 받게 된다. 

그런데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지도, 받지도, 인정치도 않는 당시 종교 지도자들, 특히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향하여 주님은 따끔한 경고를 하셨다.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46절)는 것이다. 

이들의 특징은 외형주의자들, 높임 받고 대접받기 좋아하며,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일부러 보란듯이 길게 기도하는 사람들이다(47절). 바로 이런 사람들을 '삼가하라'는 말이다. 본 받지 말고 따르지도 말라는 것이다. 왜, 누가 예수님 앞에 높아지고 교만할 수 있는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정치 않는 사람들이다.

오늘 나의 신앙을 되돌아보면서 언제든지 내 삶에 예수님이 왕이 되시고 주님이 되게 하시는 고백이 드러나게 하자.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지 않으면 나의 영적 질서는 완전히 무너져 내리기 때문이다. 오늘 내가 진정 본받고 따라야 할 분이 누구인지를 묵상해 보자.












제목 : 우문현답

본문 : 누가복음 20:19 ~ 40


악한 농부의 비유가 바로 자기들에게 한 말인 줄 깨달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그런 예수님을 책망하고 어쨌든 허물을 찾기 위하여 발버둥친다. 이번에는 세금 문제를 갖고 시비를 거는데 당시 로마의 금화를 꺼내어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않으니이까?"(22절)고 물었다. 

바쳐야 된다라고 하면 식민지를 받고 있는 처지에 로마 정부에 돈을 내는 것이므로 매국노 운운할 것이고, 그래서 바치지 않아도 된다라고 대답하면 국가에 반역하는 행위로 예수님을 고발하려는 음모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것이 그들의 악한 '간계'(23절)인 줄 알고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25절)는 말씀으로 그들의 입을 다물게 하였다. 어느 편에도 걸리지 않는 명답이었다. 세금은 국가 살림을 위하여 반드시 필요한 것이고,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은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며 섬기는 표현으로 나타나야하기 때문이다. 

그런 후 또 다른 종교 지도자들인 사두개파 사람들이 예수님을 책잡기 위하여 엉뚱한 질문을 한다(27절). 그것은 계대결혼 풍습에 관한 이야기이다. 말하자면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아내를 취하였다가 자식이 없이 죽고 그 둘째와 셋째가 그를 취하고.." 이런 식으로 일곱 형제가 다 맨 처음 형수에게 자식이 없어 그 대를 잇기 위하여 형제들이 풍습대로 그 형수를 취하여 결혼하였는데 일곱 명 자식을 낳지 못하고 한 사람씩 죽었다는 것이다.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말도 안되는 억지 논리를 갖고 주께 질문하기를 이런 경우 나중에 이들이 모두 죽어 "부활하게 된다면 이 형수는 과연 어느 형제의 아내가 되겠는가?" (33절)라는 것이다. 

이렇게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니 예수님은 "부활의 때에는 더 이상 장가 가고 시집 가는 일이 없으니 그런 걱정은 하지도 말라"(35절)고 하셨다. 정말 궁금해서, 알기 위한 몸부림이 아니라 순전히 예수님의 답변에서 어떤 허점을 찾기 위한 악한 마음으로 한 질문이기 때문이다.

이들이야 말로 어제 등장했던 악한 농부들이다. 곧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란 46절에 보니 이들은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좋아하며...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사람들"이라고 지적하셨다. 이런 위선자들에 대하여는 '더 엄중한 심판'(47절)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오늘의 내 모습에서는 이런 외식, 험담, 보이기 위한 행위, 교만과 거드럼이 정말 없는지 자신을 살펴보자. 신앙은 순수함을 잃으면 즉시 타락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더 정직한 마음으로 주님을 따라가고 섬기기 위하여 말씀에 더 충실하자. 말씀만이 내 모든 행위의 참 잣대가 되기 때문이다.